황씨신문

알약

알약, 지금도 잘 먹지 못한다. 최초로 알약을 꿀꺽 삼켜 먹기 시작한 건 1989년 11월의 일이다.

원래가 약이란 약은 모두 먹으면 토하기 바빴지만 알약은 아예 삼키질 못하니까 토할 것도 없었다.

학교에서 아플 때 선생님께서 알약을 주시면 차마 "저 알약 못 먹는데요." 라고는 못 하니까 "네." 하고 받아서는 손에 꽉 틀켜쥐고 있는다. 그러면 알약이 손에서 다 녹아버린다. 선생님께는 다 나았다고 하든가 여전히 아프기 때문에 집에 가야겠다고 하든가 하고.

사정이 이렇게 때문에 내가 먹는 약은 주로 물약이었는데 (물약은 거의 토하지 않는다) 심하게 아프면 어쩌겠어? 알약이라도 먹어야지.

알약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. 캡슐에 가루 형태로 들어 있는 것, 외부가 코팅된 딱딱한 알약, 그리고 순수 그 자체의 알약.

캡슐에 가루 형태로 들어 있는 것은 캡슐을 분해해서 그 안에 든 가루를 숟가락 위에 쏟고 물로 개어 먹으면 된다. 순수 그 자체의 알약도 대부분 물에 넣으면 풀리기 때문에 개어 먹을 수 있다. 하지만 외부가 코팅된 알약은 물에 잘 녹지 않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는 먹을 수 없다. 그러니까 꿀꺽 삼키지 않고는 먹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.

엄마는 캡슐 형태의 알약을 선호하셨다. 물에 개어 먹이기 쉬우니까. 그리고 내가 아플 때면 우리집 안마당에는 파란색과 흰색의 반 쪽 짜리 캡슐이 쌓여갔다. (어려서는 참 많이 자주 아팠다)

그건 그렇고 1987년 11월, 즉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떻게 해서 알약을 먹게 되었을까?

사실 중학교 때도 알약 네 개를 먹은 일이 있긴 하지만 이건 정당한 방법(!)으로 먹은 게 아니었다. 큰오빠가 구충제 (당시 서세원이 광고에 나왔던 다섯 알이 한 세트인 노란색 알약)를 사와서 먹으라고 줬는데 내 나이에는 세 알이었지만 네 알 먹으라는 것이었다. 알약 삼키지도 못하는데 이걸 어떻게 먹나? 했지만 큰오빠는 무서웠기 때문에 눈물 찔끔 알약 집어넣고 물 마시고 꿀꺽?

꿀꺽 하고 목구멍 너머로 넘어간 건 알약이 아니라 물이었다. 오직 물만이 넘어가 주었다. 물 한 컵, 물 두 컵, 물 세 컵, 물 네 컵, 물 다섯 컵, ... 결국 알약 네 개는 물에 녹아 조금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 주었다. 약이 쓰지 않았기에 망정이지.

다시 고 1로 돌아와서, 그 때 나는 온가족을 경악시킨 병(?)에 걸리게 되었는데 바로 주부습진이라는 병이었다.

"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네가 어떻게 주부습진에 걸릴 수 있니?"

가 이 병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이었다.

병원에서 받아온 약은 갈색 코팅된 알약이었다. 그러니까 물에 개어 먹을 수 없는 형태의 알약이었던 것이다.

먹을 수도 없고 안 먹을 수도 없고.

고민에 빠진 내가 받은 조언이란, 우선 알약을 입 안에 넣고 혀를 이용해서 어금니쪽으로 살살 몰아간 다음 어금니를 이용해 알약을 반토막 내어 크기를 줄인 다음 삼키는 것이었다. 어디 해볼까?

그리고 이 방법이 성공했던 것이다.

지금도 난 이 방법으로 알약을 먹는다. 하지만 이 방법으로도 먹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삐콤씨나 아로나민 골드 같은 영양제다. 예전에 한 번 먹어보려고 시도해 봤는데 도무지 반으로 토막낼 수가 없다. 망치로도 때려봤지만 절대 잘라지지 않는다. 그리고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. 조금 잘라진 부스러기 아로나민 골드를 먹어 봤다가 오.장.육.부.가 다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.

어쨌거나 이래서 난 영양제를 먹지 못하고… 그래서 더 비실비실한가?

내가 알약 먹기에 언제나 성공하는 건 아니다. 가끔씩, 그러니까 알약을 먹기 시작해서 이틀 정도가 지나면 그때부터는 알약이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 주질 않고 꼭 중간에 걸려서 생명에 위협을 느끼도록 만든다. 그 결과, 난 알약을 지어올 때 절대 이틀치를 초과해서 지어오지 않게 되었다.

끝으로 세 가지를 더 말해 볼까?

  1. 알약을 먹게 된 후 약 사올 때 변한 점
    • 알약을 먹기 전 - "알약 주지 마세요. 다 빻아 주세요."
    • 알약을 먹게 된 후 - "가루약 주지 마세요. 모두 알약으로 주세요."
  2. 알약을 먹게 된 후 나쁜 점

    캡슐 껍데기 모으는 취미 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.

  3. 알약 먹는 다른 방법

   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알약 먹는 얘기를 하다가 나와 같은 애들이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. 다음은 그 때 친구들이 말해 준 알약 먹는 방법이다.

    • 알약을 아이스크림 속 깊숙이 넣어 먹는다. (아이스크림 먹다 보면 모르는 사이 알약을 먹게 된다.)
    • 알약을 밥 속에 넣어 먹는다. (밥을 먹다 보면 역시 모르는 사이에 알약을 먹게 된단다.)
4334-05-31 | 황미자 | 황씨신문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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